1922년 10월 '로마 진군' 이후 이탈리아의 권력을 장악한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스트 정권은 국가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예술, 교육, 언론, 그리고 스포츠까지도 파시즘의 이상을 선전하고 국민의 지지를 동원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축구는 무솔리니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무솔리니

대중적 인기와 국제적 영향력을 가진 축구는 파시즘의 강력한 선전 수단이자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파시즘 시대(1922-1943)의 이탈리아 축구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변화했는지, 그리고 무솔리니의 정권이 세리에 A와 국가대표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파시즘 이전의 이탈리아 축구: 엘리트 스포츠에서 대중 문화로

파시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이탈리아 축구의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축구는 19세기 말 영국인 상인과 선원들에 의해 이탈리아에 소개되었고, 초기에는 주로 북부 산업 도시의 엘리트 계층이 즐기는 스포츠였습니다. 

제노아, 토리노, 밀라노와 같은 도시에서 최초의 클럽들이 형성되었고, 1898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이 설립되었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축구는 점차 노동자 계층에게도 인기 있는 스포츠로 발전했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접하게 되었고, 지역 클럽을 중심으로 열정적인 팬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탈리아 축구는 여전히 지역적 분열이 심했고, 국제 무대에서의 성과도 미미했습니다.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았을 때, 이탈리아 축구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대중적 인기는 높아지고 있었지만, 체계적인 조직과 국가적 통합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상황을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전파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파시즘의 도구로서의 축구

무솔리니는 스포츠, 특히 축구의 선전적 가치를 일찍부터 인식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열정적인 스포츠맨으로 묘사했고, 실제로 승마, 펜싱, 수영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습니다. 

축구에 대한 그의 개인적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축구의 정치적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파시스트 정권의 스포츠 정책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스포츠를 통해 '새로운 이탈리아인'—강하고, 규율 있으며, 국가에 충성하는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국제 대회에서의 성공을 통해 이탈리아의 위상을 높이고 파시즘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1926년,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축구를 중앙집권화하고 통제하기 위해 'Carta di Viareggio'(비아레지오 헌장)를 도입했습니다. 

이 개혁으로 이탈리아 축구 연맹(FIGC)은 국가 올림픽 위원회(CONI)의 통제 아래 들어갔고, CONI는 직접 파시스트 당의 감독을 받았습니다. 

또한 클럽들은 외국인 선수와 코치의 고용을 제한받았고, 모든 경기장에는 파시스트 상징과 선전물이 의무적으로 전시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스타디움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스포츠 시설을 넘어 파시즘의 건축적 선전물이었습니다. 

토리노의 스타디오 무솔리니(현 스타디오 올림피코)와 로마의 스타디오 데이 마르미(현 스타디오 올림피코)와 같은 경기장들은 웅장한 규모와 고전적 디자인으로 파시즘의 위엄과 로마 제국의 영광을 상기시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AS로마 홈구장인 스타디오 올림피코


세리에 A의 변화, 국가 통합과 파시스트 상징

1929년, 이탈리아 축구는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기존의 지역별 리그 대신 단일한 국가 리그인 세리에 A가 창설된 것입니다. 

이는 축구를 통한 국가 통합이라는 파시스트 비전의 일부였습니다. 

세리에 A는 북부와 남부,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클럽들을 하나의 경쟁 구도로 통합함으로써 지역적 분열을 극복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파시스트 정권은 클럽 차원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AS 로마는 파시즘과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1927년 로마의 여러 소규모 클럽들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AS 로마는 수도의 위상에 걸맞은 강력한 클럽을 만들고자 하는 무솔리니의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클럽의 색상인 붉은색과 노란색은 로마 시의 색상이었으며, 구단 문장에는 로마의 전설적 창건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상징하는 늑대가 포함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파시스트 정권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클럽 중 하나는 볼로냐 FC였습니다. 

1932년부터 1941년까지 볼로냐는 5번의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고, 이 성공은 파시스트 당 간부이자 볼로냐의 후원자였던 레안드로 아르피나티의 지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볼로냐 선수들은 경기 전에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도록 요구받았고, 이로 인해 '파시스트의 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클럽이 파시즘을 열정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벤투스와 같은 일부 클럽들은 피아트의 소유주인 아넬리 가문의 보호 아래 상대적인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리보르노와 같이 강한 좌파 전통을 가진 클럽들은 파시즘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주리의 황금시대

파시즘 시대 이탈리아 축구의 가장 큰 성공은 1934년과 1938년 연속 월드컵 우승이었습니다. 

이 승리들은 무솔리니에게 완벽한 선전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1934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월드컵은 파시스트 정권의 역량과 효율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무대였습니다. 

모든 경기장에는 파시스트 상징이 가득했고, 무솔리니 자신이 많은 경기에 참석했습니다. 

특히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이긴 후의 축하 행사는 파시즘의 승리를 기념하는 국가적 축제로 변모했습니다.

1938년 프랑스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더욱 상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는 당시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던 헝가리를 4-2로 격파했습니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이탈리아 선수들이 파리에서 열린 경기에서 검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 전 파시스트식 경례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국제 스포츠 무대를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활용한 노골적인 사례였습니다.

두 번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초는 무솔리니의 신임을 받았지만, 항상 정치적 압력 아래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동시에 선수 선발과 훈련 방식에서 파시스트 이상에 부합하는 강인함과 규율을 강조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 축구의 스타 선수들, 특히 주세페 메아차와 실비오 피올라와 같은 인물들은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들의 성공은 '이탈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선전되었고, 그들의 이미지는 파시스트 프로파간다에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통제와 저항의 역학

파시스트 정권이 축구를 통제하려 했지만, 축구장은 때로는 저항과 대안적 정체성의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노동자 계층이 많이 사는 지역의 클럽들은 지역 정체성과 계급 연대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토리노 FC는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파시즘의 엘리트주의와 대비되는 노동 계급의 가치를 상징했습니다. 

1940년대 초반 '그란데 토리노'로 알려진 팀은 세리에 A를 지배했고, 그들의 성공은 파시스트 정권의 선전으로 활용되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계급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유대인 클럽들의 운명입니다. 

1938년 무솔리니 정권이 반유대적 인종법을 도입하자, 유대인 선수와 임원들은 축구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밀라노의 유대인 클럽 우가레세(Ugarese)와 같은 팀들은 해체되었고, 많은 유대인 축구 관계자들이 망명이나 은둔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파시즘과 축구의 관계는 복잡했습니다. 

한편으로 무솔리니 정권은 축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국가적 통합을 촉진하고 국제적 위신을 높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축구는 완전히 통제될 수 없는 문화적 현상이었고, 경기장은 때로 정권의 메시지를 벗어난 감정과 정체성이 표현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파시즘의 몰락과 이탈리아 축구의 변화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듬해 파시스트 정권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이탈리아 축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전후 이탈리아 축구는 파시즘의 영향에서 벗어나 재건되었지만, 그 유산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파시즘 시대에 구축된 많은 인프라—스타디움, 훈련 시설, 국가적 리그 구조—는 전후 이탈리아 축구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시스트 상징과 의식은 제거되었고, 축구는 점차 순수한 스포츠와 오락으로 돌아갔습니다.

1949년 슈퍼가 토리노 팀이 탄 비행기가 수페르가 언덕에 추락하는 비극은 파시즘 시대와 전후 시대 사이의 상징적인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이 사고로 이탈리아 축구의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국가 전체가 애도에 빠졌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탈리아 축구는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세리에 A는 점차 상업화되고 국제화되었으며, 정치적 이념보다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중요해졌습니다. 

인테르, AC 밀란, 유벤투스와 같은 클럽들은 강력한 재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유럽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축구와 정치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축구 클럽들은 여전히 지역적, 계급적, 이념적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경기장은 사회적, 정치적 표현의 장으로 기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AC 밀란과 인테르 간의 경쟁은 종종 정치적 의미를 띠었고, 전자는 노동계급과 좌파, 후자는 중산층과 우파와 연관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현대적 반향

파시즘 시대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는 오늘날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요? 

한편으로, 이 시기는 이탈리아 축구의 국제적 성공과 세리에 A의 구조적 발전을 이룬 중요한 시기로 인정받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축구가 권위주의 정권의 선전 도구로 활용된 어두운 역사로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이탈리아에서 이 시기에 대한 기억과 평가는 복잡하고 때로는 논쟁적입니다. 

두 번의 월드컵 우승은 여전히 자랑스러운 성취로 기념되지만, 그것이 이루어진 정치적 맥락은 종종 애매모호하게 다루어집니다. 

많은 이탈리아 축구 팬들은 파시스트 정권 아래에서의 성공을 정치적 맥락과 분리하여 순수한 스포츠 성취로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일부 극우 팬 그룹들은 파시즘의 상징과 레토릭을 이용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라치오의 '이리둘티빌리(Irriducibili)'와 같은 울트라스 그룹은 때때로 파시스트 상징을 전시하고, 인종차별적 행동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탈리아 축구가 여전히 과거의 파시스트 유산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반파시스트 전통을 가진 클럽들도 있습니다. 리보르노, 볼로냐, 토리노와 같은 클럽의 팬들은 종종 좌파적 성향을 보이며, 이는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저항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포츠와 정치권력의 복잡한 관계

파시즘 시대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는 스포츠와 정치권력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사례입니다. 

무솔리니와 그의 정권은 축구를 정치적 도구로 성공적으로 활용했지만, 동시에 축구는 완전히 통제될 수 없는 문화적 현상이었고, 때로는 저항과 대안적 정체성의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스포츠의 대중적 인기와 감정적 호소력은 정치 권력에게 강력한 선전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러나 스포츠는 또한 공동체 정체성, 지역 자부심, 계급 연대의 표현 수단이 될 수도 있으며, 이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스포츠의 역사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스포츠 자체의 내적 논리와 가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축구는 파시즘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났지만, 그 시대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세리에 A의 구조, 클럽들의 정체성, 일부 팬 문화에서 과거의 유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포츠가 단순한 게임을 넘어, 사회의 역사와 정치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때로는 그것을 형성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탈리아 축구와 파시즘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넘어,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 정치, 권력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스포츠는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영역이 아니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파시즘 시대 이탈리아 축구의 이야기는 이러한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