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발칸반도의 정치 지형만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섯 개의 올림픽 경기와 네 번의 월드컵에 참가했던 강력한 축구 국가는 불과 몇 년 만에 여러 개의 작은 국가 대표팀으로 분열되었고, 한때 유럽에서 가장 경쟁력 있던 국내 리그는 민족적 경계를 따라 해체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국가 대표팀과 클럽에서 함께 뛰던 선수들이 갑자기 적대적인 국가의 시민이 되었고, 축구장은 전쟁터의 연장선이 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분열과 그에 따른 발칸반도 축구의 변화는 스포츠가 어떻게 정치적 격변에 영향을 받고 또 이에 반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강력한 상징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입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축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축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이끈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독특한 성격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 여러 민족과 종교(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가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티토는 "형제애와 통합(Brotherhood and Unity)"이라는 슬로건 아래 이러한 다양한 집단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촉진하려 했고, 축구는 이 비전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일명 '플라비(Plavi, 파란색들)'는 모든 민족 집단의 선수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보스니아인, 마케도니아인이 함께 뛰며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1960년과 1968년 유럽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1962년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하는 등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국내 리그인 유고슬라비아 제1리그도 전국의 클럽들을 아우르는 강력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세르비아), 디나모 자그레브(크로아티아), 하이둑 스플리트(크로아티아),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세르비아), FK 사라예보(보스니아) 등 다양한 지역의 클럽들이 참가했고, 이들 간의 경쟁은 치열했지만 대체로 평화로웠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의 1991년 유럽 챔피언스 컵(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입니다.
이 팀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몬테네그로인, 마케도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결승에서 프랑스의 마르세유를 꺾고 우승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이 최고의 순간은 국가가 해체되기 직전에 찾아왔습니다.
티토 시대의 유고슬라비아 축구는 민족 간 협력과 사회주의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클럽들은 국영기업이나 군대, 경찰과 같은 국가 기관과 연계되어 있었고, 스포츠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건강과 단결을 증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평화 아래에는 민족 간 긴장이 존재했고, 이는 특히 티토 사후 1980년대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경기장에서의 전쟁 전조, 1980년대 민족주의의 부상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한 후, 유고슬라비아는 경제적 어려움과 민족 간 증가하는 긴장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축구장에도 반영되었고, 경기장은 점차 민족주의적 감정과 갈등의 표현 장소가 되어갔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는 1990년 5월 13일 자그레브의 막시미르 스타디움에서 열린 디나모 자그레브와 레드스타르 베오그라드의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선수들 간의 싸움과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대규모 폭동으로 인해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취소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 팬들은 크로아티아 국기를 흔들며 독립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쳤고, 세르비아 팬들은 유고슬라비아의 통합을 주장하는 구호로 맞섰습니다.
디나모의 주장 즈보니미르 보반(Zvonimir Boban)이 크로아티아 팬을 구타하던 유고슬라비아 경찰을 발로 차는 장면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상징적인 순간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종종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시작된 날"로 언급될 만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실제 전쟁이 시작되기 1년 전, 축구장에서 이미 민족 간 갈등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정치적, 민족적 정체성의 강력한 표현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1990년 9월 26일 스플리트에서 열린 하이둑 스플리트와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의 경기에서 발생했습니다.
하이둑 팬들이 유고슬라비아 국기를 불태우고 반(反)세르비아 구호를 외쳤고,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의 독립 열망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이 시기 축구 경기장은 민족주의적 상징과 구호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깃발, 전통적인 노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언급 등이 축구 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이는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고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90년대 발칸 축구의 파편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발칸반도의 축구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축구 연맹과 국가 대표팀, 리그 시스템도 민족 경계를 따라 분리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1991년에 독립을 선언하자, 이들은 곧 자체 축구 연맹을 설립하고 국제 경기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국가 모두 1996년 유럽 챔피언십 예선부터 독립 국가로 참가했고, 특히 크로아티아는 1998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수크, 보반, 프로시네츠키, 야르니 같은 선수들로 구성된 크로아티아의 첫 "황금 세대"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 |
1998년 월드컵 크로아티아 축구팀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5년 데이턴 협정 이후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고, 1996년 FIFA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민족적으로 분리된 세 개의 리그(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가 존재했고, 이들이 통합된 단일 리그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2002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마케도니아(현 북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도 각각 1994년과 2006년에 자체 축구 연맹을 설립했습니다.
몬테네그로의 경우, 2006년까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라는 단일 국가의 일부였기 때문에 축구적으로도 더 오랫동안 세르비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1992-2003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사용)는 1992년 UEFA와 FIFA로부터 제재를 받아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1992년 유럽 챔피언십(덴마크가 대신 참가하여 우승)과 1994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제재가 해제된 후에도, 이 팀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고, 2006년 몬테네그로의 독립 이후에는 단독으로 세르비아 대표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은 한때 강력했던 유고슬라비아 국내 리그도 해체시켰습니다.
각 신생 국가는 자체 리그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이들은 규모와 재정, 경쟁력 측면에서 과거 통합 리그에 비해 훨씬 약했습니다.
많은 유능한 선수들이 더 부유한 서유럽 리그로 이적했고, 이로 인해 국내 리그의 경쟁력은 더욱 하락했습니다.
전쟁 속의 억압과 생존의 이야기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지역에서 축구는 중단되거나 심각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부 가장 극심한 분쟁 지역에서 축구는 희망과 정상성의 상징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는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세르비아 세력에 의해 포위되었고, 시민들은 지속적인 포격과 저격수의 위협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에서는 축구 경기가 계속되었습니다.
FK 사라예보와 같은 클럽들은 폭격으로 파괴된 경기장에서,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경기를 치렀습니다.
이러한 경기들은 저항과 생존의 상징이 되었고, 피포위 상태의 시민들에게 잠시나마 일상의 감각을 제공했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1991년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 동부 도시 부코바르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지역 클럽 HNK 부코바르는 활동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크로아티아군에 입대했고, 일부는 전쟁 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 후 클럽이 재건되었을 때, 이는 도시 자체의 재건과 회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또한 많은 선수들의 경력과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일부는 민족적 배경 때문에 자신이 뛰던 클럽을 떠나야 했고, 다른 이들은 안전을 위해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 출신의 많은 선수들이 터키, 독일, 그리고 다른 서유럽 국가로 이주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자국의 신생 국가 대표팀에서 뛰게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새로운 국적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다민족적 배경을 가진 선수들은 어떤 국가를 대표할지에 대한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습니다.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Predrag Mijatović)와 같은 몬테네그로 출신 선수는 유고슬라비아(후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대표하기로 선택했고,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Robert Prosinečki)와 같은 혼혈 선수(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혼혈)는 크로아티아를 대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치적 의미를 띤 더비 경기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기존 라이벌리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리그를 만들었습다.
한때 같은 리그에서 경쟁하던 클럽들이 이제는 국경으로 분리되었고, 국제 경기에서만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영원한 더비(Eternal Derby)"로 알려진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와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의 라이벌전입니다.
이 더비는 유고슬라비아 시대에도 중요했지만, 국가 해체 후에는 세르비아 축구의 핵심 행사가 되었고, 더 큰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레드스타의 "델리예(Delije)" 울트라스와 파르티잔의 "그로바리(Grobari)" 울트라스는 종종 정치적 메시지와 민족주의적 상징을 경기에 도입했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디나모 자그레브와 하이둑 스플리트 사이의 "영원한 더비"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두 클럽의 라이벌리는 유고슬라비아 시대에도 존재했지만, 독립 후에는 국가 정체성과 지역 자부심이 더해져 크로아티아 축구의 중심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새로운 라이벌리는 국제 무대에서 나타났습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등 과거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들 간의 경기는 단순한 축구 경기를 넘어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기들은 종종 추가적인 보안 조치가 필요했고, 때로는 원정 팬의 입장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2013년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경기는 이러한 정치적 긴장이 어떻게 축구장에서 표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입니다.
이 경기는 경기장 위로 대알바니아(알바니아와 코소보를 포함하는 영토)를 묘사한 깃발을 단 무인 드론이 날아들면서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양 팀 선수들 간에 난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발칸 지역의 미해결된 영토 분쟁과 민족 간 긴장이 여전히 축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새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국외에 거주하는 발칸계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이들이 새롭게 형성된 국가 정체성과 자신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고, 축구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호주, 독일, 스위스, 스웨덴 등 유고슬라비아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한 국가들에서, 발칸계 디아스포라 커뮤니티는 종종 고국의 축구팀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고, 국가 대표팀 경기는 공동체 정체성을 확인하고 고국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디아스포라 출신 선수들이 발칸 국가들의 국가대표팀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많은 신생 국가들이 해외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고, 이는 국가 정체성의 보다 포용적인 개념을 촉진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경우, 1998년 월드컵 3위 팀에는 호주 출신의 조셉 시무니치와 같은 디아스포라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스웨덴, 독일, 미국 등에서 자란 디아스포라 선수들을 적극 영입하여 2014년 월드컵에 첫 출전할 수 있었습니다.
에딘 제코, 미랄렘 퍄니치, 아셀 베고비치와 같은 선수들은 전쟁 중이나 그 직후에 보스니아를 떠났지만, 국가대표팀에서 뛰며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코소보는 2016년에야 FIFA와 UEFA의 회원국이 되었지만, 곧 스위스, 독일, 스웨덴 등에서 자란 코소보계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때때로 이중 국적 선수를 둘러싼 경쟁으로 이어졌는데, 샤키리, 샤카, 베흐라미와 같은 코소보계 선수들이 스위스 대표팀을 선택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현대의 발칸 축구, 도전과 희망
유고슬라비아 해체 후 30년이 지난 오늘날, 발칸 지역의 축구는 어떤 모습일까요?
각국은 저마다의 도전에 직면하면서도 새로운 정체성과 성공을 구축해가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는 가장 두드러진 성공 사례입니다.
400만 명 남짓한 작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는 2018년 월드컵 준우승, 1998년과 2022년 월드컵 3위 등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
2022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한 크로아티아 |
모드리치, 라키티치, 만주키치 등으로 구성된 "두 번째 황금 세대"는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고, 크로아티아를 세계 축구의 강국으로 확립했습니다.
세르비아는 불안정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풍부한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바탕으로 꾸준히 좋은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세계 축구계에 밀린코비치-사비치, 블라호비치, 요비치, 타디치 등의 인재를 공급했고, 2022년에는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처음으로 출전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경험했지만, 이후 주요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코, 퍄니치와 같은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고, 국내 축구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마케도니아는 2021년 유럽 챔피언십에 처음 출전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고, 2022년 월드컵 예선에서 독일을 상대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판데프, 엘마스 같은 선수들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높이고 있습니다.
슬로베니아와 몬테네그로도 제한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경쟁력 있는 팀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각각 2010년과 2006년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발칸 지역 축구는 여전히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치적 간섭, 부패, 낙후된 인프라, 재정적 어려움 등이 지속적인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국내 리그는 대부분 경쟁력과 인기 측면에서 서유럽 리그에 크게 뒤처지며, 최고의 선수들은 일찍이 해외로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민족주의적 긴장과 폭력, 인종차별 사건도 여전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2018년 세르비아 대 스위스 월드컵 경기에서 샤키리와 샤카가 알바니아 독수리 세리머니를 한 것이나,
세르비아와 코소보,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의 경기에서 종종 발생하는 민족주의적 구호와 상징들은 과거의 갈등이 여전히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축구를 통한 새로운 가능성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그에 따른 발칸 축구의 변화는 깊은 상처와 분열을 남겼지만, 동시에 화해와 전진의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제 대회에서 발칸 국가들이 서로 경기할 때, 이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과거 갈등의 평화적 해소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013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월드컵 예선 경기는 양국 관계 정상화의 중요한 단계로 여겨졌고, 양측 지도자들이 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또한 발칸 출신 선수들이 서유럽 클럽에서 다른 민족 배경의 동료들과 함께 뛰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한때 적대적이던 민족 출신의 선수들이 바르셀로나, 인터 밀란, 리버풀과 같은 클럽에서 팀메이트로 함께 성공을 거두는 모습은 강력한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의 네마냐 비디치와 크로아티아의 네마냐 마티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함께 뛰었고, 세르비아의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와 보스니아의 에딘 제코가 첼시에서 동료로 활약했습니다.
유소년 축구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Open Fun Football Schools'와 같은 국제 이니셔티브는 발칸 지역 전역에서 다른 민족 출신의 어린이들이 함께 축구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어린 세대에게 상호 존중과 화합의 가치를 가르치며, 과거의 갈등을 넘어 공동의 미래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UEFA와 FIFA도 발칸 지역 축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프라 개발, 코칭 교육, 유소년 프로그램 등에 자금을 지원하고, 반인종차별과 반폭력 캠페인을 통해 더 포용적인 축구 문화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UEFA의 'Respect' 캠페인은 발칸 국가들의 축구 연맹과 협력하여 인종차별과 민족주의적 폭력에 맞서고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교훈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역사와 그 해체의 여파는 스포츠와 정치, 정체성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풍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한편으로는 축구가 어떻게 국가 건설과 민족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화해와 상호 이해의 플랫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축구 유산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러 후계 국가들에 분산되어 새로운 형태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세계적인 성공, 세르비아의 지속적인 인재 배출, 보스니아와 북마케도니아의 역사적 첫 본선 진출 등은 모두 과거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강점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이 상실되었습니다. 통합된 리그의 경쟁력, 다양한 민족 배경의 선수들이 하나의 국가를 대표하던 모습,
그리고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의 축구 문화 등은 돌이킬 수 없이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더 넓은 정치적, 사회적 분열의 반영이자 결과입니다.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역사는 스포츠가 얼마나 깊이 사회의 다른 측면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상기시킵니다. 축구는 결코 단순한 경기가 아니었으며, 특히 격변의 시기에는 정체성, 소속감, 정치적 충성도의 표현 수단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스포츠의 보편적 언어와 공유된 열정은 분열된 사회에서도 공통점을 찾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오늘날 발칸반도의 축구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각국은 자체적인 축구 문화와 전통을 발전시키면서도, 공유된 역사와 지역적 연결성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균형을 찾는 과정은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화해와 통합의 여정을 반영합니다.
분열에서 다양성으로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발칸반도 축구의 변화는 한 시대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통합된 하나의 강력한 축구 국가는 여러 개의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었지만, 각국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축구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국제 무대에서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종종 고통스럽고 폭력적이었으며, 축구장은 때로 민족 갈등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축구는 또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고, 국제적 인정을 얻으며, 과거의 적들 사이에 대화와 상호 존중의 다리를 놓는 데 기여해왔습니다.
발칸반도의 축구 이야기는 단일성에서 다양성으로의 전환,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도전과 기회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스포츠가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고 때로는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갈등 속에서도 화합의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풍부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유산은 그 후계 국가들의 다양한 경험과 성취 속에 살아있습니다.
그것은 분열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새로운 형태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스포츠와 사회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축구가 어떻게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 수단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