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의 다채로운 역사 속에는 종교, 계급, 정치적 신념에 기반한 다양한 클럽들이 존재합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 정체성과 연결된 클럽들의 이야기는 유럽의 복잡한 사회문화적 지형과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입니다.
아약스 암스테르담, 토트넘 홋스퍼, 바이에른 뮌헨, MTK 부다페스트와 같은 클럽들은 단순한 축구팀을 넘어서 유대인 역사, 박해, 회복력, 그리고 통합의 상징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이들의 역사는 축구장 안팎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경험한 승리와 비극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아약스 암스테르담 - 유대 정체성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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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약스클럽 로고 |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인구는 도시 전체의 약 10%를 차지했고, 이들은 지역 사회와 문화 생활에 깊이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아약스 암스테르담은 1900년에 설립되었고, 비록 처음부터 '유대인 클럽'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클럽의 위치와 회원 구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유대인 팬과 선수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와 40년대, 아약스는 유대인 회장 한스 니유언후이스의 지도 아래 네덜란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클럽의 홈 구장은 당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지구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유대인 팬들이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간(1940-1945) 동안 아약스와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클럽의 많은 유대인 회원들과 임원들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암스테르담의 10만 명이 넘는 유대인 중 약 75%가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 이후, 아약스는 점차 회복했고 1970년대에 요한 크루이프와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유럽의 강팀으로 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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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약스 시절 요한 쿠르이프 |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클럽의 유대 정체성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아약스 팬들은 자발적으로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경기장에 오기 시작했고, 자신들을 '슈퍼 유대인(Super Jews)'이라 부르며 유대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홀로코스트의 비극 이후 살아남은 유대인 공동체의 회복력을 상징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오늘날 아약스 팬들의 유대 정체성 표현은 때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경쟁 팀 팬들이 반유대주의적 구호나 비하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일부에서는 실제 유대인이 아닌 팬들이 유대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 문화적 전유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약스와 유대 정체성의 연결은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이는 클럽의 역사와 암스테르담 도시의 다문화적 특성을 반영합니다.
토트넘 홋스퍼-유대인의 진정한 축구 클럽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어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영국 런던 북부에 위치한 토트넘 홋스퍼(일명 '스퍼스')는 또 다른 유명한 '유대인 클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2년에 설립된 이 클럽은 20세기 초중반부터 유대인 팬들과 강한 연결고리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동유럽에서 온 많은 유대인 이민자들이 런던 북부와 동부에 정착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토트넘 지역에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클럽인 스퍼스를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30년대부터 토트넘 홋스퍼와 유대인 공동체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1936년, 영국 파시스트들이 유대인이 많이 살던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행진을 계획했을 때 벌어진 '케이블 스트리트 전투'는 영국 내 반유대주의와 이에 맞선 저항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고, 이후 유대인 공동체는 더욱 결속하며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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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 스트리트 전투 |
이 시기에 토트넘은 유대인 팬들에게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트넘은 실질적으로 유대인과 더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습니다.
1961년 클럽은 헝가리계 유대인 감독 빌 니콜슨 아래에서 20세기 영국 축구 최초로 리그와 FA컵 동시 우승(더블)을 차지했습니다.
이어서 1982년부터 2001년까지는 유대인 사업가 앨런 슈거(현 경)가 클럽을 인수하여 회장을 맡았고, 이 시기에 토트넘의 유대인 연관성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토트넘 팬들은 자신들을 '이디시 아미(Yiddish Army)'라 부르며 유대 정체성을 수용했지만, 이 역시 아약스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문제를 낳았습니다.
"Yid" 또는 "Yiddos"라는 단어가 본래 유대인에 대한 비하적 용어였기 때문에, 토트넘 팬들이 이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토트넘 팬들은 이 용어를 재전유하여 긍정적 의미로 바꾸었다고 주장하지만, 영국 축구협회와 일부 유대인 단체들은 이 용어의 사용을 지양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토트넘은 여전히 많은 유대인 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1년부터는 유대인 사업가 다니엘 레비가 클럽의 회장을 맡아 경영하고 있습니다.
레비는 토트넘을 현대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변화시키며 새로운 경기장 건설과 재정 안정화를 이끌어 중위권팀이였던 토트넘을 상위권팀으로 이끌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 - 잊혀진 유대인 루츠
현재 김민재 선수가 속해있어 한국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독일의 빅클럽인 바이에른 뮌헨의 역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유대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클럽은 1900년에 설립되었고, 설립 멤버 11명 중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클럽의 초기 회장 중 한 명인 쿠르트 란다우어는 유대인이었으며, 1930년대 초반까지 클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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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의 아버지로 불리는 쿠르트 란다우어 |
그러나 나치당이 1933년 정권을 잡은 후, 바이에른 뮌헨은 심각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클럽은 "유대인에게 친절한" 클럽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많은 유대인 임원들과 회원들이 클럽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란다우어 회장은 사임을 강요받았고, 결국 1943년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전후 바이에른 뮌헨은 빠르게 성장하여 독일과 유럽 축구의 강자로 자리 잡았지만, 클럽의 유대인 역사는 오랫동안 덮여 있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야 클럽은 자신의 역사 속 유대인의 역할과 나치 시대의 비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관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쿠르트 란다우어와 같은 유대인 회원들의 이야기를 클럽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MTK 부다페스트 - 헝가리의 유대인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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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로고 |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MTK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대인 연관 클럽 중 하나입니다.
1888년에 설립된 이 클럽은 특히 20세기 초반부터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중산층과 강한 유대를 형성했습니다.
클럽의 회장이었던 알프레드 브룰은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였으며, 그의 지도 아래 MTK는 헝가리 축구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1920-30년대 헝가리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심화되었고, MTK는 이에 대항하는 유대인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클럽은 당시 혁신적인 전술과 훈련 방식을 도입했으며, 이는 후에 헝가리 '마이티 마자르스(Mighty Magyars)' 황금시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의 유대인들은 끔찍한 박해를 겪었고, MTK의 많은 선수와 임원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전쟁 이후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클럽은 국영화되었고, 유대인 정체성은 의도적으로 지워졌습니다.
그러나 1989년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MTK의 유대 역사와 전통은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MTK는 헝가리 축구에서 여전히 중요한 클럽이며, 유대인 역사와의 연결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클럽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자신의 역사를 통해 관용과 다양성의 가치를 홍보하고 있습니다.
하코아 빈 - 최초의 유대인 스포츠 클럽
하코아 빈(Hakoah Vienna)은 축구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설립된 이 클럽은 애초부터 명시적으로 유대인 정체성을 내세운 최초의 주요 스포츠 클럽이었습니다.
'하코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힘'을 의미하며, 클럽의 창립 목적은 당시 널리 퍼져있던 유대인에 대한 편견("유대인은 신체적으로 약하다")에 반박하고 유대인 청년들에게 스포츠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1920년대 하코아는 오스트리아 축구의 강자로 부상했고, 1925년에는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클럽은 또한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어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시범 경기를 펼쳤습니다.
특히 1926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이겼을 때, 이는 유대인 스포츠 클럽의 가장 큰 국제적 성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반유대주의가 고조되면서 하코아는 점차 어려움을 겪었고,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에는 클럽이 해체되었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미국, 영국, 팔레스타인(현 이스라엘) 등으로 망명했고, 일부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전후 하코아는 재건되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하코아 빈은 여러 스포츠 부문을 운영하는 작은 클럽으로 남아있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과 상징성은 여전히 큽니다.
하코아는 유대인 스포츠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스포츠를 통한 유대인 자긍심과 정체성 표현의 모델로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반유대주의와의 싸움
불행히도, 반유대주의는 유럽 축구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약스, 토트넘과 같은 유대인 연관 클럽들은 종종 반유대적 구호와 비하의 대상이 됩니다.
경쟁 팀의 일부 팬들이 가스실 소리를 흉내 내거나, '히틀러의 군대'를 언급하는 등의 충격적인 행동이 보고됩니다.
이에 대응하여 여러 클럽들과 축구 당국은 반유대주의 퇴치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첼시 FC는 로만 아브라모비치(유대인 러시아 사업가)의 소유 시절인 2018년 'Say No To Antisemitism' 캠페인을 시작했고, 영국 프리미어 리그와 독일 분데스리가도 유사한 반인종차별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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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모비치 |
유대인 연관 클럽들 자체도 자신들의 역사를 교육과 인식 제고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약스는 클럽 박물관에서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의 클럽과 유대인 회원들의 역사를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토트넘은 반유대주의 행동에 대해 무관용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축구와의 연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럽의 유대인 클럽들과 이스라엘 축구 사이에는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형성되었습니다.
많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 선수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그곳의 축구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하코아 빈의 여러 전 선수들은 이스라엘에 하코아 텔아비브를 설립했고, 이 클럽은 초기 이스라엘 축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아약스와 토트넘 같은 클럽들은 종종 이스라엘 팀들과 친선경기를 가지며 연대를 표현했고, 유대인 팬들 사이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흔드는 것은 정체성 표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복잡성으로 인해, 이러한 표현이 때로는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현대 축구에서의 유대 정체성
오늘날 유럽 축구에서 유대 정체성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박해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생존과 회복력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약스, 토트넘, MTK 부다페스트와 같은 클럽들에게 유대 연관성은 자부심의 원천이자 차별과 싸우는 플랫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선수, 코치, 구단주들은 현대 축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비 코헨(리버풀), 요시 베나윤(첼시, 웨스트햄), 탈 벤 하임(첼시) 같은 선수들, 아브람 그랜트(첼시, 웨스트햄 감독), 다니엘 레비(토트넘 회장) 같은 인물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축구계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축구는 항상 사회의 거울이었습니다.
유대인 클럽의 역사는 유럽의 복잡한 역사, 특히 박해와 통합, 배제와 수용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이 클럽들의 이야기는 종종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동시에 회복력과 생존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현대 축구에서 유대 정체성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차별에 맞서며, 더 포용적인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약스의 '슈퍼 유대인', 토트넘의 '이디시 아미', MTK 부다페스트의 역사적 전통은 단순한 응원 구호나 마케팅 이미지를 넘어, 축구가 어떻게 공동체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의 보존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입니다.